⠀“나 사실 밀웜이야.”
⠀정미는 읽고 있던 두꺼운 양장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목소리는 음정의 변화 없이 차분했다. 여진은 정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의자에 앉으려던 몸뚱이를 엉거주춤 일으켰다. 여진의 귓가에 꽂힌 말이 제 처지를 비난하기 위한 공격도, 어설프지만 심심한 위로를 건네려는 격려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 퇴사했어. 정미가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내뱉기 전 여진이 한 말이었다. 길지 않은, 짧고 이해가 어렵지 않은, 단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한 문장. 같은 시기에 회사에 입사한 남자 동기가 승진과 더불어 임금 인상 협상에 들어간 동안 여진은 정리 해고를 당했다. 이후 여진은 회사에 나가는 대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할 준비만을 마치고는 거리로 나갔다. 봄을 시기하는 바람에 거리는 추웠다. 하늘은 푸르게 빛나는 대신 쥐색 매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온통 흑백인 건물 사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정장 입은 사람들의 단호한 발걸음은 가만히 앉아 할 일 없는 여진을 힐난하는 듯했다. 그러니 여진의 말은 도심 한복판 카페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행위에, 망상일지 진짜일지 모르는 행인들의 날선 눈빛에 지칠대로 지쳐서 집에 들어온 날, 힘겹게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정미는 예상한 반응의 궤도에서 한참이고 벗어난 문장으로 여진의 고백에 화답해왔다. 웃음과 걱정과 공감으로 여진의 설움을 품어주는 대신 기계적인 몸짓으로 책장을 거듭해 넘겼다. 그 상식선을 벗어난,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답변이 여진을 괴롭혔다. 몇 년간의 회사 생활이며, 일 주간 견뎌온 바깥의 피로를 고스란히 안고 있던 여진은 정미의 사소한 지분거림마저 참을 수 없었다.
⠀여진은 두 손으로 식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한 팔에 걸치고, 다른 팔로는 가방을 들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서 쿵쾅대는 소리가 울렸다. 여진은 방에 들어가 일부러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잠시간 아랫집이 층간 소음에 대해 불평하던 것이 떠올랐지만, 여진은 고개를 저어 애써 잊으려 했다.
⠀방 안에 들어선 여진은 짐과 겉옷을 책상과 의자에 던져놓고 곧장 침대에 누웠다. 한참을 긴장해있던 몸이 나른해졌다. 여진은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다른 감각이 곤두섰다. 눈을 통해서는 느끼지 못하게 된 세상 대신, 소리와 향기로 앞을 볼 수 있었다. 창 밖을 바쁘게 지나다니는 퇴근길 차량들의 경적, 빨지도 않고 몇 주간 회사에 오가며 입은 코트에서 나는 매연과 음식점 냄새. 지긋지긋한 도시. 청년주택청약의 만기일이 가까워지는 오래된 빌라 3층 끝 방. 여진이 가물거리는 정신을 붙잡고 정미의 반응을 겨우 되새김질할 때, 풍경에 갑자기 이질적인 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삭. 아삭. 야채를 씹는 것 같은 소리. 여진은 눈을 떠서 방문을 바라보았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여진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밝혀내려 했으나, 일정한 박자로 들려오는 자장가 같은 소리에 감겨오는 눈꺼풀과 피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잠에 들었다. 잠들기 전 여진은 생각했다. 정미가 원래 이 시간에 야식을 먹었던가.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여진은 눈을 깜빡였다. 정미가 보였다. 정미의 뒤로 교실 벽에 걸린 시계가 보였다. 시침은 벌써 열 두 시를 향하고 있었다. 여진은 그제야 자신의 배에서 들려오는 꼬르륵소리를 들었다.
⠀“점심 먹으러 가자.”
⠀아냐, 괜찮아. 정미가 말했다. 요즘 들어서 정미는 밥을 안 먹었다. 매점에서 정미가 가장 좋아하던 과자를 사들고 와 입술 앞까지 갖다 대도 입을 열 생각을 도통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진이 혼자 급식 먹는 게 싫다는 티를 내면 정미는 꼭 급식실까지 따라와서 여진이 밥 먹기를 기다려주었다.
⠀급식에 푸딩이 나왔다. 정미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여진은 한 술 크게 떠 정미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정미는 이번에도 입을 열기는커녕,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급히 자리를 떴다. 핑계는 여전했다. 화장실이 급해서. 여진은 혼자 남겨진 채 천천히 남은 급식을 먹었다. 정미에게 주려고 뜬 푸딩 한 술의 양이 너무 많아서 여진은 한 입에 푸딩을 넣을 수 없었다.
⠀여진은 6층으로 향했다. 급식실이 2층, 여진의 교실은 3층이었다. 6층으로 향하는 계단 입구에는 망가진 책상과 의자가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학교의 그 누구도 6층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교직원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진과 정미 단 두 명을 제외했을 때. 남들이 다 급식을 먹으러 간 점심시간, 그곳에 가면 홀로 잠긴 칸 안에서 아삭대는 소리가 들렸다. 야채를 씹듯. 여진은 정미가 그 안에 숨어 점심으로 샐러드를 먹겠거니 짐작했다. 밥을 안 먹던 것도 모두 다이어트 때문이었다. 여진은 생각했다.
여진은 잠긴 칸 바로 옆의 칸막이에 몸을 기대어 섰다. 곧이어 정미가 칸의 잠금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부스럭거리는 비닐 봉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진은 정미가 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본 적 없었다. 여진은 생각했다. 내가 오기 전에 이미 다 먹고 치웠구나. 급식을 먹지 않아도 정미는 정미네, 여전히 잘 먹는 것을 보니.
⠀여진은 눈을 떴다. 초봄의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고 포근한 햇살이 건조히 부르튼 피부에 와 닿았다. 새소리, 교통체증 없이 조용한 거리, 나른히 개운한 몸.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무슨 꿈을 꿨는지 생각할 새 없이 여진은 화장실로 달려갔다. 수온을 조절하는 것도 잊고 얼음장같은 냉수로 세안을 하고 물기를 대충 닦아냈다. 로션은 사치였다. 옷장 서랍 맨 위칸에 있는 니트를 걸쳐입고 책상 의자 위에 널부러져있는 가방을 챙겼다. 몸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날씨에 맞지 않는 두꺼운 상의 때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여진은 한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냉장고 옆의 식탁에는 정미가 앉아있었다. 여진은 정미와 눈을 마주쳤다. 어제의 대화가 떠올랐다.
여진은 추태를 보인 것에 차게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쳐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살포시 닫자 정미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아침 먹게 옷 갈아입고 나와.
여진이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을 때, 정미는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었다. 여진은 하품하며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 컵라면은 하나였다. 여진의 시선을 알아챈 정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난 이미 먹었어.”
⠀여진은 고개를 두 번 끄덕이고 수저를 가져왔다. 물을 부은지 3분 후, 뚜껑을 깨끗이 떼고 여진은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여진이 라면 용기 밑바닥의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떠 먹을 때까지 거실은 조용했다. 마침내 여진이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어 텅 빈 스티로폼 재질의 컵라면 용기를 들고 일어섰을 때 정미가 입을 열었다.
⠀“그거 그냥 옆에 둬. 내가 치울게.”
⠀여진은 고개를 돌려 정미를 쳐다보았다. 어제의 실언에 대한 사과이기라도 한 걸까. 빨간 기름 닦기 힘들텐데. 여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오랜만에 먹은 인스턴트 식품의 여파로 더부룩한 속을 이끌어 거실로 걸어갔다. 소파에 바른 자세로 앉아 고개를 조금 돌리자 시선 끝에 부엌이 닿았다. 정미는 여진이 먹고 남은 흔적을 치우고 있었다. 스티로폼에 남은 붉은 흔적을 주방세제와 수세미로 닦아내고 있었다. 단조롭고 가벼운 동작을 반복하는 정미의 뒷모습과 부른 배, 나른한 감각에 여진이 눈꺼풀이 쳐지려는 찰나였다. 여진은 정미가 깨끗이 닦인 스티로폼 용기를 작게 잘라 한 입 크기로 만드는 것을 보았다. 정미가 잘린 스티로폼 용기를 샐러드볼에 담는 것을 보았다. 정미가 그릇과 포크를 들고 다시 식탁에 앉는 것을 보았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장면에 여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장 부엌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정미가 오른손에 든 포크로 스티로폼 조각 하나를 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미가 그 스티로폼 조각을 입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아삭. 아삭.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가 들렸다.
⠀“너 뭐해?”
⠀“밥 먹어.”
⠀여진의 쏘아대는 듯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정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여진은 대답의 의미를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했으나 정미가 또 한 번 오른손에 쥔 포크를 그릇으로 옮긴 것으로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여진은 곧장 정미의 오른 손목을 잡고 말했다.
⠀“병원 가자. 장난 그만 쳐.”
⠀그러나 정미의 대답 대신 여진의 귀에 들려온 것은 음식을 삼키는 소리였다. 정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일렁였다 사라지는 굴곡이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여진은 정미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더 세게 주었다. 이를 악 무느라 턱이 아팠다. 몇 초간의 심호흡 후에 여진은 덜덜 떨리는, 기어들어가다시피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 미안해. 장난 그만해. 여진은 자신이 무엇에 미안해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식탁 위에 놓인 그릇을 향해 이번에는 왼팔을 뻗으려는 정미의 행동으로 여진은 방금 전의 사과가 무용했음을 깨달았다. 여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여진은 정미의 손목을 놓아주고, 뒤를 돌아보거나 더 입을 여는 일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진이 잡고 있던 정미의 손목에만 빨간 자국이 남았다.
⠀밤이 되자 집은 조용했다. 정적 속에서 같은 소리만이 반복하여 들렸다. 아삭. 아삭. 여진은 헤드폰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날카롭게 곤두선 청각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어젯밤 들었던 소리도 정미가 스티로폼을 씹는 소리였을까? 정미는 왜 스티로폼을 먹은거지? 끊이지 않는 의문에 여진은 핸드폰을 켜고 검색 엔진을 열었다.
⠀스티로폼 먹으면
⠀스티로폼 먹음
⠀자잘한 플랫폼의 글이 검색창 밑으로 주르륵 나열되었다. ‘스티로폼이 녹았는데 환경호르몬 어찌해야 할까요’, ‘아이가 스티로폼을 먹었어요.’, ‘강아지가 스티로폼을 먹었어요.’와 같은 제목의 고민상담 글이 넘치는 걸로 보아 분명 스티로폼을 먹는다는 행위가 상식선 이내의 것은 아닐 터였다. 여진은 다른 것을 검색하기 위해 검색창의 글자를 지워갔다.
⠀ 스티로폼 먹
⠀연관 검색어: 스티로폼 먹는 곤충
⠀검색창 아래에 뜬 연관 검색어가 보였을 때, 여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곤충. 스티로폼을 먹는 곤충이 있다. 정미는 분명 자신이 밀웜이라 말했다. 여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터치했다. 검색 결과를 본 여진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었다. 비단 그 한숨은 검색 결과의 맨 위에 등장한 징그럽게 생긴 곤충의 탓만은 아니었다.
⠀‘스티로폼을 먹는 곤충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밀웜’은 플라스틱을 먹는 벌레입니다. 밀웜의 소화기관에는…’
⠀여진은 툭 고개를 떨궜다. 힘없이 풀어진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몇 번이고 마른 세수를 했다.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볼을 꼬집기도 했다. 통증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장난일 거야. 여진이 퇴사했음을 입에서 꺼내 놓은 날 정미가 읽고 있던 책은 두꺼운 양장본의 곤충 사전이었다. 정미가 읽고 있던 페이지에 밀웜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었을 것이다. 정미는 분명 침울한 표정의 자신을 보고 분위기를 풀고자 읽고 있던 내용을 바탕으로 농담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스티로폼을 먹을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여진은 눈을 감았다. 정미를 처음 만났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정미는 잘 먹는 아이였다. 틈만 나면 입에 뭔가 물고 있었다. 수업시간에마저 입 안에 넣어 놓고 들키지 않을 만한 것이라면 초콜릿, 사탕, 껌, 엿, 비타민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먹었다. 맛이 없기로 소문난 급식도 가장 첫 번째로 달려가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식단으로 어떤 음식이 나오는 지와 상관없이 매일같이. 함께 다니던 친구들은 정미를 보고 ‘돼지’와 같은 비난조의 말을 서슴없이 내뱉곤 했다. 여진은 못들은 척해야 했고 정미는 웃어 넘겨야 했다. 그런 게 우정이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여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미에게 초콜릿을 하나 더 건넨다든가, 둘만 아는 동네 변두리 놀이터 낡은 그네에 나란히 타고 삐걱이는 소리를 들으며 야 애들 진짜 이상하지 않냐, 돼지는 무슨 돼지야 같은 말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무리 내의 은근한 따돌림은 점점 심해져 그들은 어느 날엔 식성이 좋기로 유명한 곤충이 음식을 종류 가리지 않고 먹는 영상을 정미의 앞에 내밀었다. 정미는 일찌감치 잔반을 버리고 온 그들과 다르게 마지막까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정미의 눈 앞에 기다랗고 꿈틀거리는 벌레 수 백마리가 움직이는 영상이 비춰졌다. 정미는 그때 어땠더라. 분명 말없이 급식판을 비웠다. 잘도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영상을 틀었던 애들이 매점에 갔을 때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던 것도,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정미 말곤 아무도 없었던 화장실에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도 단지 비위가 약해서가 아니었나? 매점에서 돌아와서 정미에게 그 벌레는 스티로폼도 먹는다며, 환경에 기여해보지 않겠느냐며 내용물 없이 텅 빈, 그러나 여전히 오물이 묻어있는 컵라면 용기를 건넨 그들을 봤을 때 정미의 표정이 어땠는지 여진은 기억할 수 없었다.
⠀이후 정미는 이상하게 적게 먹었다. 함께 급식을 먹지 않았다. 스파게티나 짜장면이 나오는 날이면 가장 먼저 급식표에 형광펜을 칠해 놓고 여진에게 보여주기 위해 달려오던 정미는 그 사건을 기점으로 사라졌다. 옆에서 누가 빵 봉지 부스럭대는 소리라도 낼라 치면 금방 교실 뒷문을 박차고 나가 찬 복도에 홀로 서서 쉬는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서성였다. 무리에서는 그저 면박을 당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라는 말만 해대며 여진의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미가 무언가를 먹을 때는 오직 혼자 있을 때였다. 누구에게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진 곳에서 정미는 겨우 무언가 씹어 삼킬 수 있었다. 남들이 다 급식을 먹으러 간 시간에 6층 복도 맨 끝의 교사용 화장실에 가면 홀로 잠긴 칸 안에서 아삭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안일하게도 정미가 정말로 살을 빼려는 건줄로만 알았다. 그 아삭대는 소리는 생 야채를 씹는 소리와 꼭 닮아 있었기에. 지금 여진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와도. 정말 밀웜이었던 거구나.
⠀여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정미가 손에 건네진 스티로폼 용기를 봤을 때, 구석진 화장실에서 나올 때 지었던 표정과 닮아 있었다. 좁은 칸 안에서 비척대며 걸어 나오다 몇 번이나 여진을 보곤 화들짝 놀라던 정미는, 온갖 핑계나 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화장실 세면대에서 기다려주는 여진에게 희미한 웃음을 보이곤 했었다. 이따금 여진이 건넨 초콜릿을 먹기도 했다. 포장지를 버려주겠다는 말을 어물쩍 넘기며.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정미의 모습에, 어두운 칸 안에서 주춤주춤 걸어나올 때면 물기로 젖어 있던 눈가와 손을 보고도 바보같이 그러려니 했던 기억이 스쳤다. 작디작은 칸을 비집고 나오는 듯했던 정미를 닮은 여진의 찡그린 눈가엔 습기가 가득했다. 꿈에서도 봤는데 왜 몰랐을까.
⠀다음 날 아침, 여진은 거실로 비척비척 걸어나왔다. 기어 다니거나, 꿈틀대는 것과도 유사한 모양새였다. 밤 새 아무것도 마시지 못한 여진은 머그잔에 물을 따라 식탁 의자에 걸터앉았다. 부은 눈두덩이가 쓰렸다. 정미는 식탁에 앉아 그제와 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 정미의 손 옆에는 잘게 자른 페트병 조각이 담긴 그릇이 있었다. 여진은 잠시간 그릇을 쳐다보다, 식탁에 얼굴을 박았다. 그때 정미가 입을 열었다.
⠀“밀웜이 자라면 뭐가 되는지 알아?”
⠀정미는 의뭉스러운 말을 꺼내놓았다. 어제처럼, 또 그제처럼 아무런 변화 없는 얼굴이었다. 그제서야 위화감이 생겼다. 정미는 어른이었다. 처음 만난 17살 이후로 강산이 한 번 하고도 반쯤 바뀌었다. 그러나 밀웜은 성충이 아니었다. 다 자라지 못한 애벌레였다. 여진은 고개를 들어 정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갈색거저리라는 곤충이야. 엄청 작은데, 날 수는 있어. 높게 날지도, 오랫동안 날지도 못한다지만.”
⠀정미는 자신이 들고 있던 곤충 사전을 여진에게 보여주었다. 정미가 펼친 책장에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까만 몸통에 날개처럼 생긴 껍질이 붙어있고, 다리가 6개, 더듬이가 2개 달린 흔한 딱정벌레의 모습이었다.
⠀“성충이 되면 식성이 변한대. 플라스틱은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나봐. 여전히 잡식이지만.”
그러나 여진은 정미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사전 책장을 넘기는 정미의 손 끝을 덧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떠다녔다. 골을 채우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커다래서 밀웜이 번데기 상태로 약 2주를 보낸다느니, 번데기에 상처가 나면 쉽게 죽는다느니, 성충은 취선이 있어서 악취가 난다느니 하는 말은 여진의 얼떨떨한 얼굴에 튕겨져 바닥에 버려졌다. 초점 없이, 자신이 입을 벌렸다고 인지하지도 못하는 여진을 보며 정미는 말을 멈췄다. 여진이 끊긴 소음에 정미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을 때 정미는 살포시 웃고 있었다. 정미는 책을 덮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 이후에 여진은 정미가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정미의 방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정미의 방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진이 정미의 방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여진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정적뿐이었다. 정미의 전화 벨소리가 방 안에서 들린 것으로, 정미가 방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는 사실로, 여진은 정미가 그 안에 숨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미와 여진이 싸운 날이면 으레 그 둘은 자기의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곤 했으므로, 여진은 정미가 단순히 자신의 반응에 화가 난 것이라고 믿었다. 하루간 집 안 분위기가 싸늘하게 유지되는 것과 모순되게, 그들은 언제나 다음날이면 싸운 원인조차 까먹고 식탁 앞에 나란히 앉아 잡다한 이야기를 떠들어댔으므로 여진은 정미의 방 문이 어서 열리기를 믿고 기다렸다.
⠀여진의 기대에 불응하듯 정미의 방 문은 이튿날 아침에도 굳게 잠겨 있었다. 정미가 새벽이나 밤 사이에 몰래 밖에 나갈까 걱정스러웠던 여진이 설치한 카메라마저 아무것도 포착하지 못했다. 여진이 잠을 청하러 간 밤부터 새벽 사이 카메라에 비친 것은 싸늘한 거실의 어두운 풍경뿐이었다. 벌레 새끼 한 마리조차 정미의 방 문으로 오가지 않았다. 정미는 정황상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여진은 집 안을 빙빙 돌았다. 갑자기 걸레를 들고 거실의 창문을 닦는가 하면, 냉장고 속의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골라냈다. 그러다가도 정미의 방 문 앞을 꼼짝 않고 응시하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해가 기울고 달이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동안 정미의 방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여진은 이불을 가져다가 정미의 방 문 앞에 깔았다. 잠이 오지 않아서 그곳에 누워 정미의 방 문을 바라봤다. 결국 닷새 째에, 여진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이불을 다시 침대 위로 가져갔다.
⠀정미가 사라진 지 아흐레가 흘렀다. 여진은 면접을 봤다. 퇴사 직후 이곳 저곳 넣었던 이력서 중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곳이었다. 여진의 경력과 연관이 높은 직종의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여진은 긴 회사 생활동안 짬짬이 만들었던 포트폴리오를 들고 면접을 보러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합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여진은 들뜬 마음으로 집 앞 편의점에 들러 맥주 네 캔을 만원에 샀다. 부푼 마음은 여진이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펑 하고 터졌다. 집은 조용했다. 원래 이 시간이라면, 정미는 식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자신을 맞이해 주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식탁은 텅 비어있었다. 여진은 비틀거리며 식탁에 편의점 봉투를 올려다 놓았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 한 캔이 굴러 떨어졌다. 정미가 좋아하던 맥주였다. 여진은 그 맥주를 처음 먹은 날, 맛이 없다고 줄창 말하면서도 한 캔을 깨끗하게 비웠다. 주량이 맥주 한 캔에 조금 못 미치는 여진으로써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진은 싫어하는, 정미는 좋아하는 맥주 네 캔. 손에 익은 버릇 같은 행동이었다. 여진은 맥주를 마시며 울었다. 앞의 빈 의자가 유독 휑했다.
⠀여진이 면접을 본 다음날, 여진은 첫 출근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며칠간 제대로 잠을 자지 않고 지냈던 탓에 혹시라도 제 때 일어나지 못할 것을 걱정했지만, 여진은 알람 소리를 듣자마자 일어났다. 식빵 한 쪽을 구워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를 우유와 먹었다. 씻고 나서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발랐다. 어젯밤 미리 골라 놓은 옷을 입었다. 이 집에 처음 이사올 즈음, 전 회사의 면접 합격 통보를 받은 후 정미에게 선물 받은 옷이었다. 가격대가 있는 브랜드의 캐주얼 정장은 주문제작으로 여진의 몸에 딱 맞았다. 여진은 그 위에 얇은 코트를 거치고 가방을 들었다. 아직 출발하기엔 많이 이른 시간이었지만 여진은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로 나간 여진은 고개를 돌려 정미의 방 문을 보았다. 여전히 미동 없이 조용했다. 여진은 조금 망설이다 정미의 방 문 앞으로 갔다. 안에 정미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여진은 방 문을 두 번 작게 두드렸다. 답변은 없었다. 나 다녀올게. 들을 사람 없는 인사가 방 문 앞을 맴돌았다. 여진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뜸을 들였다. 습관처럼 방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아래로 돌렸다. 그런데 여진이 문고리를 돌린 순간 문이 열렸다. 여진은 문소리를 잡고 있던 손을 아래로 툭 하고 늘어트렸다. 가방을 들고 있던 왼손마저 힘이 풀려, 마룻바닥과 가방이 맞닿는 소리가 났다. 여진은 숨을 끊어질 듯 들이켰다. 오랜 시간 방 안에 머무르던 공기가 축축했다. 여진은 한참 뒤 얼굴을 들었다. 방에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얼씬도 않았다. 이불은 정돈되어 있었다. 잠시나마 호선을 그렸던 여진의 입꼬리가 다시 아래로 쳐졌다. 여진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지금 눈물을 흘리면 눈이 부을 것이었다. 여진은 천천히, 힘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답답한 공기를 참다 못해 여진은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 때, 여진은 창틀에 벌레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진은 창문 앞에 쭈그려 앉아 벌레를 관찰했다. 짙은 갈색의 몸통에 다리가 6개, 더듬이가 2개 달린 흔한 딱정벌레였다. 그 곤충은 창문틀을 발로 툭툭 두드리며 여진을 올려다보았다. 벌레의 머리 아래쪽에 달린 까맣고 작은 눈과 여진의 눈이 마주쳤다. 여진은 말없이 창문을 열었다. 조용한 방에 창문을 여는 소리만이 울렸다. 열흘 넘게 방 안에 머물러 있던 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밖으로 나갔다. 쌀쌀한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창 바로 앞까지 가지를 늘어트린 벚나무는 얇은 줄기 끝에서 꽃눈을 틔우고 있었다. 벌레는 창틀 위로 기어갔다. 여진은 이윽고 방충망을 열었다. 갈색 곤충은 여진을 향해 몸통을 돌렸다. 앞 두 다리로 몸을 지탱했다 힘을 풀어 머리를 아래로 숙이는 행동이 마치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다시 창문틀을 향해 몸통을 돌린 곤충은 처음 편 듯 반투명한 날개로 밖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