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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삭거리는 사과

호수
2025년 6월호
작가
서현진
발행일
2025/06/30
언어
한국어
장르
소설
⠀"엄마는 항상 마음 속에서 주영이가 1순위였어." ⠀거짓말인 것을 알았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많은 것들이 설명되지 않았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공장지대, 공기청정기 필터에는 먼지가 촘촘히 끼어 매번 그 더러운 찌꺼기들을 씻어내려야 했다. 엄마와 나는 한 달에 한 번 동생 방과 안방, 내 방의 공기청정기 필터를 청소했다. 욕실로 가져와 샤워기 물줄기로 필터를 훑으면 검은 먼지들이 뭉텅이져 떨어져 나왔다. ⠀"이번에도 많이 쌓였네." ⠀엄마는 샤워기로 필터에 물을 뿌리고, 나는 떨어진 먼지덩이들을 손으로 주섬주섬 주워 종량제 봉투에 넣었다. 우리 집의 공기가 깨끗한 건 다 공기청정기가 자신의 몸을 더럽혀 가며 더러운 것들을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 씻어 줄 때까지 꼼짝없이 먼지를 껴안고 있을 공기청정기가 안쓰럽다. 공기청정기는 먼지를 받기만 하지, 내보낼 줄은 몰랐다. 누가 그이를 씻어줄까. ⠀안방의 필터는 먼지가 소복히 쌓였고, 내 방의 필터는 필터가 시꺼매 원래의 모양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우리는 대장부처럼 동생 방으로 향했다. 오늘 공기청정기의 원혼을 다 풀어주리라! 우리는 기세등등했다. 나는 바닥에 털썩 앉아 동생 방의 공기청정기 필터를 열었다. 동생 방의 필터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고 엄마는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했다. 걔가 닦아달라고 해서. 저번에 시간이 없어서 한 개만 먼저 닦았어. 눈치 보는 엄마의 모습. 나는 그녀를 보다 말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그녀는 알았을까. 모르겠다. ⠀그간 수많은 일이 있었다. 엄마는 동생이 아삭거리는 감과 사과를 좋아하는 건 알아도 내가 물컹거리는 복숭아를 좋아하는 건 모른다. 우리 집 냉장실에는 언제나 사과가 가득했고, 나는 물컹함을 찾고 싶어 부러 사과를 갈아 먹었다. 과도로 껍질을 벗겨 잘게 잘라버리고 믹서기에 갈아 버렸다. 그러면 말랑한 복숭아와는 다른 물컹한 덩어리진 간 사과가 완성된다. 나는 그걸 꾸역꾸역 먹다 어느 순간 먹지 않게 되었다. 사과 주스는 금방 갈변되어 종국에는 더 삼키기 싫은 무언가가 되었다. 나는 집에 안 가기로 했다. 내가 왕따 친구를 구해주다 오히려 낙인이 찍혀 결국 유서까지 썼을 때, 그녀가 그러게 왜 나섰냐고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동생이 누군갈 괴롭히다 발각되었을 때 그녀가 동생의 전학에 열을 쏟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상한 우유, 낙서된 필통, 수군거리는 목소리들, 도둑으로 모는 것. 그녀가 울부짖는 내게 엄마 좀 그만 괴롭혀 라고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할까. 그렇다면 스스로 하는 거짓말의 효용은 무엇일까. 내가 가장 많이 한 거짓말은 '괜찮다'였다. 그녀가 그것을 원했으므로. 나는 그녀와 나에게 줄곧 거짓말을 해왔다. 안 괜찮으면 네가 어쩔 건데? 속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나는 답하기가 무서워 방패를 들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내가 늘 일순위였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종종 악역을 맡고 싶지 않아 자신의 마음마저 속인다. 그녀는 스스로를 속여 이제 평안할까. ⠀"너 안 괜찮잖아. 안 괜찮다고 해도 돼. 주영아." 우진은 습관적으로 하던 내 거짓말을 간파했다. "나는 믿어도 돼. 나한테는 안 괜찮다고 해도 돼." ⠀거짓말일까. 아냐. 믿으면 안돼. 믿었다가 아니면? 안 괜찮다고 했다가 화내면? 귀찮아하면?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나를 헤집었지만 나는 다시 방패를 든다. "알겠어. 믿을게." 해사하게 웃는 내 얼굴을 그는 아프게 바라본다. 내 거짓말이 너를 아프게 했을까. 나는 모르겠다. ⠀우진은 손을 잡아줬고 유채꽃밭에서도 솜사탕을 든 벚꽃길에서도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는 뜨거운 여름이면 바다에 갔고 해 지는 노을녘을 함께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면 하늘까지 솟은 단풍나무의 흔들림을 지켜봤다. 우리에겐 겨울이 없었다. 그의 손은 언제나 따뜻했고 추울려 치면 거리에는 갓 구운 호떡과 뜨끈한 어묵이 즐비해 있었다. 우리의 겨울은 온기로 추울 틈이 없었다. 나는 우진과 결혼을 했고 우리 집 냉장고에는 봄이면 그가 좋아하는 딸기가, 여름이면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가 가득했다. ⠀아이를 낳았다. 둘째를 낳으면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아 더 낳지는 않았다. 엄마를 이해한다. 아니 사실은 이해하지 못한다. 저 조막난 손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너무 훤히 보이는데, 엄마는 어떻게 괜찮다는 그 웃음들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을까. 왜 날 사랑해주지 않은 걸까. 나는 내 훌륭했던 방패를 서서히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다. ⠀엄마가 수술을 받게 됐다. 잘못 넘어져 엉덩이뼈에 금이 갔다고 한다. 전신마취를 한 엄마는 시체 같이 창백했다. 엄마는 겨우 육십대였고, 나는 엄마와 이별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엄마는 눈을 뜨고 몽롱한지 한참을 멍하니 누워 있었다. 엄마는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때 전학 안 보내줘서, 학교 그만두게 못해서 미안해." 엄마는 교복 주머니에 구겨져 있던 쓰지 못한 식권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또 무슨 일을 당할까봐 급식실에 잘 가지 못했다. ⠀"주영이가 좋아하는 음식 엄마나 하나도 몰랐어서 미안해." 엄마는 우리 집에 사과를 잔뜩 사들고 왔다가 우리 아들에게 내가 사과는 입에도 안 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것도 몰랐어요? 아이는 천진하게 물었다고 한다. ⠀나는 이제 괜찮았다. 아주 오래 전 일들이었고 우리 집 공기청정기는 새까매지기 전에 내가 매번 청소를 해주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왜 그랬어?" 나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나이 든 엄마 앞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주름진 손으로 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줬는데 그 손길에 담긴 조심스러운 애정이 좋았다. 병실에는 뜨겁지 않은 온화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나는 이제 정말로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지켜주었던 내 유년의 방패를 이젠 버릴 수 있었다. 그동안 나를, 엄마를, 남편을,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나를 지켜주려 애써 웃느라 고생했어. 나는 이제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