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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랑과 암호의 규칙

호수
2025년 9월호
작가
성석곤
발행일
2025/09/30
언어
한국어
장르
소설
1
수연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소주 다섯 병과 2L 페트병을 반쯤 채운 생수, 500mL 페트병에 담긴 오렌지 맛 탄산음료가 있었다. 술에 취하기엔 기억할 게 많았고, 생수를 마시기에는 이 상황을 조금은 잊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탄산음료를 꺼냈다. 그녀는 뚜껑을 열고 병 입구를 입에 가져가 한모금을 마셨다.
탄산이 따갑게 목구멍을 쥐어뜯고는 식도로 흘러갔다. 수연은 입가에 살짝 묻은 음료수를 닦아내며 음료수 병을 쳐다봤다. 라벨의 왼쪽 위에 박혀 있는 제작사 로고를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얘네는 신맛만 나면 오렌지가 되는 줄 아나?
그녀는 거실 쪽을 바라봤다. 거실의 통유리에서는 정오의 밝은 햇살이 범람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한 남자의 옆모습이 그을음처럼 역광을 받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TV을 향하고 있었으나 화면은 그의 눈동자처럼 검게 꺼져 있었다. 남자는 허공을 바라보며, 마치 앞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명료하게 말하고 있었다.
“너의 통각적 아름다운을 삐용하리만치 피웠나? 워리는 정수리가 평평해지는 멸렬이었어. 아니야, 충전기를 마시고 다시 유리해봐. 사있니? 아니면 주라피사니? 메라! 지푸의 사랑 노래를 이반주리!”
수연은 부엌에서 그런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탄산음료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2
3개월 전 밤, 수연은 아파트 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이어폰을 끼우고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그녀는 이어폰 한쪽을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중년 남성 하나가 과장된 눈웃음을 지으며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수연은 그렇게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입에 남은 담배연기를 힘없이 흘렸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나이에 비해 숱이 많았으나 오래된 기억처럼 잿빛이었다.
수연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필요 이상으로 놀라워하며 라이터를 받아 들었다. 라이터를 건네받을 때 수연의 손을 스치는 그의 손가락은 꽤 의도적이었다.
“어유, 고마워요!”
남자는 담배 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다시 수연에게 건넸다. 수연은 손이 그의 손에 닿지 않게 라이터 끝을 조심해서 잡았다.
남자는 수연을 신경 쓰지 않는 척 팔짱을 끼우고 하늘을 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그는 수연이 이어폰을 다시 끼우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말을 걸었다.
“여기 살아요?”
수연은 이어폰을 끼우던 손을 멈추고 남자를 돌아봤다. 그녀는 또다시 힘없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네.”
“305동이요?”
“306동이요.”
“이웃이네. 왜 그런데 한 번도 못 봤지?”
수연은 담배를 시작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수연은 대화에서 벗어나려 다시 등을 돌리려 했지만, 남자는 다시 말을 걸었다.
“몇 살이야?”
“스물일곱이요.”
“키야, 젊네. 역시.”
수연은 이 대화가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틈이 날 때마다 이어폰을 끼우고 돌아서려 했지만 남자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듯 쉴 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무슨 일 하는지 물어봐도 되나?”
수연은 사적인 영역으로 조금씩 기어올라오는 그의 질문이 걸리적거렸다. 다행히 담배는 손가락 두 마디정도의 길이로 짧아졌기에 그녀는 두세마디만 받아주고 이 자리를 뜨자고 생각했다.
“그냥 알바해요. 편의점에서.”
“그래? 의외네. 똑똑하게 생겼는데. 나는 사업했어. 지금은 다른데 돈 받고 넘기고 쉬고 있지. 좋긴 한데 심심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수연은 똑똑하게 생겼다는 말에 심기가 거슬렸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 연기를 재빨리 마시고 뱉었다. 그녀는 옆에 놓인 깡통 재떨이에 담배를 대충 비벼 끄고 자리를 떴다.
“어? 저기, 저! 하나 더 피우고 가!”
남자는 조급하게 수연을 붙잡으려 했으나 수연은 이어폰을 꽂고 무시했다.
3
다음날에도 수연이 담배를 피우러 내려갔을 때 남성이 먼저 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가뭄과 같은 환하고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수연에게 손을 흔들었다.
“또 보네?”
수연은 잠시 멈칫했다가, 남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는 수연에게 조금씩 걸어갔다. 수연은 그런 그를 곁눈질로 훑어보며 조급하게 담배를 피웠다.
“매일 이 시간에 담배 피우러 내려와?”
수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슬리퍼 끝으로 튀어나온 남자의 발가락에 털이 길게 자라 있었다. 그의 발은 점점 그녀에게 가까와졌다.
“오늘도 알바했어? 취직은 안 하고? 여기 살려면 돈이 꽤 필요할 텐데 편의점 알바로 감당이 되나?”
수연은 부모님의 유산으로 전세를 들어 살고 있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적으로 파고드는 그의 질문이 마치 옷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벌레와 같이 느껴졌다.
남자는 수연이 자신의 질문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그럼에도 그는 웃음과 명료한 발성을 잃지 않고 우악스럽게 수연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둘은 얼굴을 마주한다면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볼에 느껴지는 남자의 온기는 불쾌하리 만치 은밀했고, 바닥에 드리워진 남자의 그림자는 수연의 그림자와 합쳐지고 있었다.
“혹시 용돈 안 필요해?”
남자가 수연의 귀에 속삭였다. 수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그녀는 얼어버렸다. 그녀는 눈을 쾡하게 뜨고 담배연기를 빠르게 마시고 뱉었다.
“내가 사업을 꽤 크게 했어서 돈이 많거든. 그런데 아내랑은 오래 전에 이혼해서 가족도 없고 할 일도 없어. 그냥 남는 시간 같이 놀면서 용돈도 받고 하면 돼. 편의점 알바하는 것보단 나을 걸?”
남자는 손을 수연의 어깨에 올렸다. 각질 진 투박한 손바닥이 그녀의 어깨를 긁으며 팔로 내려갔다. 그의 숨결에 수연의 뒷목에 습기가 맺혔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로 올라가려는 순간, 수연은 그를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빠르게 아파트 건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남자가 자신을 쫓아오지 않을까 무서웠음에도, 그녀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후 문이 닫혔다. 그제서야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수치심과 굴욕감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을 찢어놓고 있는 감정은 비참함이었다.
4
수연은 그 이후 아파트에서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도 모자를 눌러썼고 아파트 입구에서 머리만 내밀고 남자가 주변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왔다. 다행히도 남자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녀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주말 정오쯤, 그녀가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렸을 때 문틈 사이로 나타난 것은 남자였다.
“드디어 찾았네?”
남자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 들어왔다. 수연은 순간 머리가 새하얘져서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그런 수연의 반응을 의식했음에도 되려 성취감 같은 것을 느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요즘 담배 피우러 내려오지도 않더라. 매일 기다렸는데. 그래서 306동 산다는 말 듣고 1층부터 초인종 누르면서 올라왔어. 남는 게 시간이니까. 휴, 힘들었네.”
남자는 입고 있는 티셔츠 깃을 흔들었다. 수연은 손을 떨며 문틈 사이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남자에게서 도망간 것은 어떻게 보면 혐오스러운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그리고 그녀의 자비는 지금 이 순간 보란듯이 짓밟혔다. 그녀는 남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얼굴을 쥐어뜯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신 현관문을 세게 닫는 방식으로 분노를 참아냈다. 남자는 놀라서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수연은 현관에 등을 기대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눈은 타오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토가 나올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고 가슴이 미친듯이 뛰었다.
현관문 너머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 너머로 남자의 말소리가 울렸다.
“다음에 또 올게. 그땐 너무 미워하지 마!”
수연은 현관문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그러곤 힘없이 현관문에 이마를 박고는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5
그 뒤로 몇 번 초인종이 울린 적이 있으나 수연은 열어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어느 순간부터 편의점 알바를 끝나고 집에 올 때면 남자가 아파트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를 한번 노려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남자의 말은 모조리 무시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다행히 엘레베이터까지 쫓아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두달이 지나자 남자는 더 이상 수연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은 지 며칠이 지나자, 수연은 다시 마음이 조금 놓였다. 물론 남자에 대한 역겨운 감정들이 침전물처럼 쌓여있긴 했으나, 그래도 남자 이외의 것을 생각하며 가만히 누워있을 마음의 여유는 생겼다.
어느 주말 그녀는 거실 한가운데 누워 담배를 피웠다. 남자 때문에 수연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집 안이 찌든 담배 연기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혼자 살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주말의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편안하게 누워 피우는 담배에 그녀는 황홀함마저 느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수연은 순간 남자라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현관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나 곧바로 현관문 너머로 남자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기 우편입니다.”
남자와는 다른 젊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이에 수연은 안심하며 담배를 옆에 있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러고는 현관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 틈으로 거대한 곰 인형 하나가 침투해왔다. 수연은 바퀴벌레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문을 닫으려 했지만 만 문 아래 틈에 재빠르게 구두가 끼어들었다.
문틈 사이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야. 수연이!”
수연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남자는 여전히 그 환한 웃음을 지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했지? 미안해. 그래도 이렇게까지 남자의 마음을 짓밟는 거는 아니지! 그래서 내가 유튜브로 택배기사인 척하고 온 거 아니야?”
남자는 휴대폰을 들어 보여줬다. 그곳엔 택배기사가 등장하는 영상이 있었다.
“내가 오늘 정식으로 나를 소개하고 데이트를 신청하려고 옷도 빼입고 왔어!”
“가요, 제발.”
수연이 문고리를 당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수연이, 그러지 말고. 우리 일단 서로를 알아가 보는 게 어때? 수연이는 내 이름도, 나이도 모르잖아. 나도 수연이에 대해서 모르고. 아, 이름은 밑에 우체통에 우편물 보고 알았어. 내가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고백했잖아, 그치? 미안해. 요즘 여자들은 썸? 썸도 타고 사귄다는데 내가 너무 상남자식으로 나갔어. 부담스러웠지? 미안해.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이라서 그래. 아, 내 이름은…”
“제발 좀 가요! 제발, 부탁이니까.”
수연은 남자의 말을 끊고 소리질렀다. 이에 남자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남자의 입꼬리가 조금 내려갔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은 웃음에 가까웠다.
“수연이, 그러지 말고. 선물도 이렇게 사왔는데”
“필요 없어요. 알고 싶지도 않고. 제발, 신고하기 전에 제발 가 주세요. 부탁이에요.”
남자의 입꼬리가 어느새 완전히 내려갔다. 그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수연이 그 모습을 보고 동정심에 마음이 약해지길 바란 걸지 모르겠지만, 수연은 뭐가 어찌 됐든 남자가 빨리 꺼져주길 바랐다.
남자는 그렇게 몇 초간 말없이 바닥을 보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그럼 갈 테니까, 여기, 발 빼게 문 조금만 열어줘.”
수연은 아래를 내려봤다. 남자의 구두는 현관문 사이에서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수연은 씩씩거리며 구두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수연은 그가 마음을 완전히 접은 것인지 믿을 수는 없었지만, 당장 남자가 가려면 발을 빼 줘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는 곰인형을 앞세워 문 틈에 파고들어 현관으로 침투했다. 수연은 놀라며 남자를 밀어내려 했지만 자신의 상반신보다 큰 인형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녀는 곰인형에 밀려 집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이미 현관문을 닫고 구두를 벗고 있었다.
남자는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이고, 나 때문에 집에서 담배 피우는 거야? 나중에 집 팔 때 도배 다 해야겠네.”
“뭐 하는 거예요?”
수연은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다시 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이 곰인형이 사실 좀 무거워서, 내가 집에 놔주려고 했지. 보자, 어디 둘까, 안방에다 둬야 하나?”
남자는 마음대로 곰인형을 들고 집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려 했다. 수연은 일어서서 제지하려고 했으나 남자는 이미 그녀의 침실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어지럽혀진 그녀의 침대를 보며 말했다.
“머리카락 쌓여 있는 거 봐. 청소 자주 안 하나 봐? 하긴, 요즘 여자들이 집안일 신경 쓸 필요 없지. 예쁘기만 하면 되지.”
“나가요!”
수연은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남자는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며 곰인형을 침대 위에 놔뒀다. 남자는 그러고는 수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말 했잖아, 수연이. 서로 조금만 알아가자고. 저기, 거실에 재떨이 있던데 같이 담배 하나 피우면서 대화나 할까? 아니면 나가서 식사 한끼해도 되고.”
수연은 대꾸하지 않고 남자를 그저 노려봤다. 그러나 남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침실을 둘러봤다.
그때 그의 눈에 무심코 화장대 위에 있는 노트 한권이 들어왔다.
“뭐야, 이건? 일기야?”
남자는 노트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수연은 마치 뭔가가 끊어진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남자를 밀쳤다.
남자는 그대로 밀려나 쓰러졌다. 절묘하게도 그가 쓰러진 위치에 옷을 넣어두는 서랍이 있었고, 그의 뒤통수는 서랍의 모서리와 운명처럼 강렬하게 키스했다.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에서 나온 피가 끈적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본 수연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6
수연은 화장지를 들고 와 머리를 지혈했다. 다행히 피는 금방 멈췄고 남자는 숨을 쉬고 있었다. 수연은 남자가 죽지 않은 것을 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존재지만,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은 역시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묘하게 웃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수연은 그가 빠르면 오늘, 적어도 내일 아침 쯤에는 그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를 침실 바닥에 그대로 두고 거실 소파로 갔다. 그녀는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며 창밖을 바라보다 잠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그녀가 편의점에 출근하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남자는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순간 싸늘한 뭔가가 심장을 지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당장 출근을 해야 했다. 뭐가 어찌됐든 남자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아마 편의점에 갔다 오면 이미 깨어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실로 걸어갔다. 제발 그가 사라져 있고 다시는 눈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그녀는 침실 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수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자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7
수연은 손을 떨며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남자가 기절해 있는 침실 쪽을 계속 흘끗 쳐다보며 조급하게 연기를 마셨다 뱉었다.
그녀는 인터넷에 머리를 부딪치고 기절한 사람에 관한 사례를 찾아보았다. 며칠 기절했지만 멀쩡히 깨어난 사례도 있는 반면 며칠 의식을 잃은 후 허무하게 죽어버린 사례 또한 많았다. 결국 수연은 인터넷을 뒤지는 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그녀는 소파에 웅크려 앉아 흔들리는 눈동자로 침실 쪽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제발 귀신처럼 소름 돋는 모습으로 침실에서 남자가 기어 나와 주길 바랐다.
그러나 새벽이 되도록 침실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지쳐 쓰러지듯 그녀는 소파 위에 잠에 들었다.
다음날도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잠들어 있었다. 수연은 그 모습을 보고 손을 떨며 휴대폰을 들어 편의점 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점장님. 제가 오늘 몸이 많이 아파서요. 죄송해요.”
그녀는 그렇게 편의점에 출근하지 않고 남자를 내려다봤다. 하루 일을 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틀째 자신의 침실에 기절한 남자를 두고 태연하게 일이나 하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시체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으로 남자를 내려다봤다. 시체를 되살려내기 위해는 뭘 해야 할까? 심폐소생술이라도 해야 하나? 그러나 그런 거창한 것을 하기에 그녀는 지식도 없었고, 남자 또한 너무 편안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남자를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저기요.”
여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엎드려 얼굴을 바닥에 붙이고 남자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고는 더 큰 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그녀는 남자의 귀 앞에 박수까지 쳐보았지만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그녀는 남자의 옆에서 남자를 불렀다. 공허한 외침 속에서 피로가 쌓일 무렵, 문득 그녀는 남자의 몸에서 중년 남성 특유의 체취가 느껴졌다.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그의 주름과 점, 쥐젖과 같은 것이 자세하게 보였다. 그 옆에 그녀는 마치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입을 가까이 대고 그를 부르고 있었다.
순간 감당하기 힘든 허탈함이 수연에게 몰려왔다. 편안히 잠든 남자의 얼굴을 보니 그녀는 그를 죽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살아나지 않기에 죽이고 싶다는 이상한 감정이었지만, 그녀에게 그런 건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엔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남자를 부르던 그녀의 말은 점점 언성이 올라갔다.
“저기요, 저기요, 저기요, 이 씨발 새끼야, 야! 일어나라고! 개새끼야!”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남자의 머리를 발로 밟고 싶은 유혹이 들었으나, 그러면 정말로 남자가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어 결국 그녀는 허공에다 소리를 지르며 침실 밖을 나왔다.
“왜 안 일어나냐고! 변태 새끼가, 진짜!”
그렇게 그녀는 한참을 집안을 누비며 소리를 지르고 발광을 했다. 그러나 그 부르짖음 속에서도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수연은 지쳐서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녀는 담배를 꺼내 피우며 침실 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는 한시간마다 남자가 일어났는지 확인하러 갔지만 남자는 밤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말라 죽어가는 심정으로 담배만 피웠다. 일을 하루 뺐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결국 헛되이 하루를 날린 대가로 얻은 것은 그녀가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뿐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졌고, 그녀가 또 담배를 피우려 담배갑을 열었지만 비어 있었다. 그녀는 밖에 나가 사오고 싶었으나 기력이 없었다. 하루 종일 남자를 확인하고 남자를 부르고 그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느라 그녀는 지쳐 있었다. 결국 그녀는 빈 담배 갑을 아무 곳에나 던져버리고는 웅크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무릎 사이에 고인 작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생각이 흘렀다. 쓰러져 있는 남자의 모습, 그녀가 밀쳐 서랍에 머리를 부딪친 남자의 모습, 그녀의 집으로 침투해온 남자의 모습, 흡연장에서 그녀의 몸에 손을 대던 남자의 모습이 무미건조하게 흘러갔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그녀는 이렇게 고통받아야 할까?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단편적인 답은 그녀가 담배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담배를 시작해 흡연장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그를 만난 것이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담배를 시작했을까? 그에 대한 답변인 듯 눈 앞에 최근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언젠가부터 매일 밤에 담배를 사가는 여자가 한 명이 편의점에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웃으며 담배를 주문했다. 그녀가 피우는 담배는 그녀 이외엔 아무도 사지 않는, 하얀 배경에 빨갛게 고양이 실루엣이 그려진 담배였다. 그렇기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수연은 그녀의 담배 위치를 외우고 빠르게 건네주기가 언제나 힘겨웠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녀가 또 담배를 주문하자 수연은 허둥댔다. 여자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내가 여기만 온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못 외웠어?”
수연은 그녀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치를 봤지만 여자는 그저 장난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수연이 간신히 담배를 찾아 그녀에게 건네주자 여자는 말했다.
“한 갑 더 줘.”
수연은 이에 말없이 한 갑을 더 꺼내 바코드를 찍었다. 담배 두 갑을 계산한 후 여자는 수연에게 그 중 한 갑을 내밀었다.
“언니, 담배 피워?”
수연은 당황하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피워봐. 언니 언제나 표정이 너무 우울해. 이거 한 대 피우면 기분이 진짜 좋거든? 그러니까 이거 피우고 내 담배 앞으론 잘 외워, 알겠지?”
그렇게 말하고 여자는 편의점을 나섰다. 수연은 멍하니 여자가 나간 자리를 보다가, 그녀가 남기고 간 담배를 바라보았다.
그날 일이 끝나고 그녀는 골목 구석으로 가 담배를 꺼냈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나 눈치를 보며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처음에 잘 붙지 않아 그녀는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그녀는 담배를 빨면서 불을 붙여야 불이 붙는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그녀는 불을 붙이며 처음으로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고, 순간 머리가 멍해지며 격하게 기침을 했다. 연기는 그녀의 목구멍을 지나 기관지까지 갔다가, 기침이 나오며 빠져나왔다. 흡연자들이 표현하듯 맛있는 맛도 아니었다. 오히려 역겹고 눅눅하고 매운 맛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녀는 왠지 모르게 오기가 생겼다. 그녀는 계속 담배 연기를 목구멍에 쑤셔 넣고 기침했다. 머리가 멍하고 목이 따가웠으나 그녀는 계속 했다.
왠지 모르게 그녀는 오랜만에 웃음이 나왔다. 입에는 기분 나쁜 냄새가 풍겼고, 기침 때문에 입가에 침이 길게 늘어져 덜렁거렸지만 그녀는 오랜만에 본인이 불행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연기의 매캐함에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큰 소리로 기침을 하며 연기를 빨고 뱉고 웃었다.
며칠이 지나자 그녀는 아무런 불편함 없이 흡연을 했다. 가끔 그 여자가 오면 편의점 옆에서 같이 담배를 피웠다. 여자는 담배를 알려준 자신에게 고마워하라는 식으로 생색을 내곤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 여자가 편의점에 오지 않았다. 수연이 지나가며 듣기로는 편의점 가까이 있는 유흥 노래방이 경찰에게 단속을 당했다고 했다.
같이 담배를 피울 사람이 없으니 그녀는 혼자 피웠다. 결국 그녀는 집에 와서도 담배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파트 아래 흡연장에 내려왔고, 거기서 남자를 만난 것이었다.
8
수연은 거실의 통유리로 넘쳐흐르는 햇살에 눈을 떴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자세 그대로 잠들었기에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햇살이 따뜻하게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째선지 그녀는 기분 좋은 꿈을 꾼 것만 같이 몸이 개운했다. 아직도 꿈 속을 헤매는 듯한 따뜻함이 그녀의 혈관에 흘렀다. 그녀는 좀 더 자고 싶다는 생각에 무릎에 얼굴을 비볐지만, 순간 그녀의 바로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쑤리하는 미춀까?”
수연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앞에 서 있는 것은 정장을 입고 서 있는 남자였다.
수연은 너무도 죽이고 싶은 저 사람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며 명하니 그를 쳐다봤다. 다시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수연은 남자에게 곧바로 말을 걸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그러나 남자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했다. 가뭄처럼 건조하고 환했던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그의 표정은 공허했다. 그는 수연이 불러도 그녀 쪽을 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초점 없는 눈동자로 수연 머리 위의 어느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연은 남자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머리 위를 봤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연은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건드렸다. 그러나 남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눈 앞에 손을 흔들어봤으나 그는 그저 목석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수연은 마치 시체를 보는 듯한 불쾌한 감정을 느껴졌다.
그러나 그때, 남자는 허공을 그대로 바라보며 명료한 발음으로 말했다.
“세균하는 블루스적 나일을 자로자로 의자.”
“네?”
“그저 팔꿈치는 빨대하지 않는 퐁로화? 하지만 지닐 밖과 소크라테스하는 듀라비는 죽음. 찾아와 셰라의 아침.”
수연은 눈을 크게 뜨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남자는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했다.
“뽑았어. 가죽. 루이는 태양을 커피했잖아? 하지만 그대, 턱턱턱을 배꼽해주오.”
수연은 어느새 부엌까지 멀찍이 떨어졌으나, 남자는 개의치 않고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했다.
“로이아, 사로가는 이피에 주랑? 이라샤 팔이를 냉장처럼 냉장해도 술 없이 달적이야? 임꺽정. 통갹통갹 모니터 검은 책상.”
“주리로 코호몰로지 세번째 단계적 아나스. 밴드. 밴드. 밴드. 밴드. 울룰루 미남의 집.”
“야이코프스키로나주 카타푸라디스오 라스꼬라스꼬 유라.”
수연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9
남자는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는 지칠 때까지 말을 하다가 새벽에 쓰러지듯 잠들었고, 일어나면 다시 똑같은 자리에서 헛소리를 시작했다.
그의 자세는 매일 바뀌었다. 첫날에는 가만히 서있었고, 어떤 날에는 팔을 대자로 벌리고 있었으며, 오늘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자세는 그가 잠들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수연은 아침에 일어나 침실에 나올 때마다 바뀐 그의 자세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그럼에도 수연은 희망을 품었다. 또다시 인터넷을 찾아보니 저렇게 한동안 미쳐 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큰 병이 의심되니 병원에 방문하라고 권유하는 글이었음에도, 그녀는 최대한 지금 이 일이 커지길 원치 않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112나 119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일로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손이 떨렸다.
그러나 엿새정도가 지난 날, 그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남자의 바지가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남자의 바지 아래에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가 고여 있었다. 그녀는 코를 틀어막으며 그것을 바라봤다. 남자의 소변은 수분을 섭취하지 못해 색이 진하고 냄새가 지독했다. 수연은 남자의 얼굴이 쾡하고 몸이 조금씩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수연은 급하게 부엌으로 가 컵에 물을 따르고 어제 먹다 남긴 밥을 한 숟가락 풀었다. 그녀는 컵을 들고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한 팔을 앞으로 내민 채 꼿꼿하게 서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디라쿠라적 마리! 혁명의 세제는 밥솥에 영감. 베이, 베이, 베이, 베이!”
그녀는 컵을 들고 남자를 두려운 듯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천천히 컵을 그의 입에 갖다 대고 기울였다. 남자는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면서도 입에 들어오는 물과 밥을 삼켰다.
남자가 미친 이후로 처음으로 그의 말이 멈췄다. 그러나 컵을 다 비우자 그는 다시 헛소리를 시작했다.
“수리야죠! 액젓! 올리브 블루스 에반스를 초록빛깔하자! 건수 은검 주리야!”
헛소리에 다시 열중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수연은 당장의 두려움이 조금 사라졌다. 적어도 남자가 아사할 일은 없어진 것이니까. 그녀는 남자 발 아래 흐르는 소변을 보고는 걸레를 들고 와 그것을 닦아냈다.
10
걸레를 빨아 건조대에 건 후 그녀는 부엌에서 남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의 바지는 이제 조금 말라 있었으나, 부엌에서도 미세하게 그의 마른 소변 냄새가 풍겨왔다. 그녀는 그 냄새를 지우고자 담배 연기를 더 깊이 마셨다.
급한 일이 해결되고 긴장이 풀리자 순간 어떠한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왔다. 그녀는 싱크대에 있는, 방금 남자에게 물과 밥을 먹이기 위해 썼던 컵을 바라봤다. 거실에서 풍겨오는 암모니아 냄새와 밤이 되도록 멈추지 않는 남자의 헛소리, 빨래대에 걸린 걸레, 그리고 자신의 허리를 감싸려 했던 남자의 기억. 갑자기 그녀는 이 모든 것에 둘러싸인 스스로가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담배 연기를 마시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담배 연기가 집 안에 머무는 것을 그녀는 건조하게 바라봤다. 담배 연기 위에 어떤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부가 하얗고 앞머리가 잘 어울리는 그는 화사하게 눈 웃음을 짓고 있었다.
수연은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민현아.”
그의 이름과 함께 그녀의 기억이 담배 연기를 타고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 남자를 만났는가? 담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담배를 시작했는가? 편의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편의점에서 일을 시작했는가? 왜 그렇게 우울하게 카운터에 서서 그 노래방 도우미 여자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는가?
편의점에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히도 생활비를 위해서였다. 다른 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준비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원했다. 적당히 시간에 맞춰 기계처럼 바코드를 찍고 물류를 정리하다가 잘리면 다른 데서 쉽게 일할 수 있는, 그런 일. 찬란한 장래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우울감에 젖어 죽어가면서도 할 수 있는 일.
그러면 그녀는 왜 그런 일을 하고 싶었는가? 왜 그녀는 우울감에 젖어 죽어가고 싶었는가? 그것에 대한 답변이 지금 수연을 향해 웃고 있는 민현이었다.
그녀는 민현에 대한 기억을 뒤적거렸다. 분명 그는 2년 전, 공원 벤치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결혼할까?”
그날은 밤하늘이 맑게 내려앉은 겨울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수연은 자신의 몸이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민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투명한 겨울 공기 너머로 민현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에 수연을 확실히 담은 채 말했다.
“내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인 거 알아. 결혼해도 화려한 결혼식은 못할지도 몰라. 풍족한 생활을 못할 수도 있고. 그래도 너랑 살고 싶어. 이렇게 초라한 나더라도”
“초라하지 않아!”
수연은 민현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이에 굳어 있던 민현의 얼굴이 풀어졌다. 차갑게 식은 그녀의 피부 위로 눈물이 온기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녀는 울먹이며 민현에게 말했다.
“초라하지 않아, 네가 어때서! 난 너랑 있으면 너무 행복해. 너랑 평생 살아도 좋을 것 같아.”
“정말?”
민현 또한 눈물을 흘렸다. 둘은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듯 들떠 보였지만, 결국 그저 말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수연은 그의 품속에 파고 들며 두꺼운 패딩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내 심장이 이제 혼자 뛰진 않겠구나 하고, 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고요한 새벽 속에 흩어졌던 외로운 나의 숨결도, 공허를 구겨 지어낸 나의 웃음도, 허공에 투신하던 나의 손길도, 이젠 너의 피부와 눈동자에 모두 담기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녀에게 병원에서 전화가 걸어왔다. 민현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과로로 판단이 흐려져 안전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11
수연은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는 것이 두려웠다. 남자의 헛소리를 듣고,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불안해하는 시간은 그녀에게 지옥과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남자의 헛소리도, 그의 배설물도, 식사도, 생각하면 그녀는 비참해서 죽고 싶었다.
그녀는 성인용 기저귀를 샀다. 그녀는 남자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잠들면 그의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를 벗겼다. 남자의 배설물이 그의 완선과 둔부까지 묻어 있었다. 그녀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것을 참고 걸래와 대야를 들고 왔다. 그녀는 걸래를 물에 적시고 남자의 하반신을 닦았다.
그 일을 할 때 그녀는 최대한 허공을 바라보고 민현을 생각했다. 민현이와 함께 걷던 시간, 민현이와 함께 나눴던 입맞춤, 그가 보내줬던 다정한 웃음. 민현을 계속 생각하면 남자의 하반신을 닦는 것도 참을만했다. 오히려 오랫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민현을 생각하니 그녀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웃기까지 했다.
어느새 그녀는 민현을 생각하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서 일을 하다가도 문득 집에 있는 남자가 떠오르면 그녀는 황급히 민현을 떠올렸다. 그러면 그녀는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결국 매순간 민현을 떠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현과 함께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실실 웃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남자의 헛소리를 들을 때도, 출근할 때도, 일할 때도, 퇴근할 때도, 남자에게 밥을 먹이고 그의 몸을 닦을 때도, 그녀는 맥없이 웃었다. 민현이 떠난 이후 처음으로 그녀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민현과 함께 있을 때보다도 그녀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민현이라는 존재가 애초에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그녀는 모호하게 느꼈다. 그와의 기억도, 지금 민현을 추억하는 것처럼 모두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일일지도 몰랐다.
그녀와 교대하는 점장이 그녀에게서 인수인계를 받다가, 그녀의 표정을 물끄러미 보고는 이렇게 묻기도 했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이에 수연은 웃으며 답했다.
“네.”
12
어느 주말의 정오였다. 수연은 히죽히죽 웃으며 소파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 남자는 여전히 헛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민현아. 그때 생각나?”
그녀는 마치 첫사랑을 앞둔 소녀처럼 몸을 꼬며 부끄러워했다.
“시현이가 중학교 친구들이랑 술 먹는데 불러서 나갔을 때. 그때 우리 테이블 맨 끝에 있어서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서로한테 눈이 갔잖아. 계속 눈 마주치고. 너 진짜 귀여웠어. 그런데 술 취해서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고 다음날 바로 잊었거든? 그런데 며칠 뒤엔가 너한테 카톡이 와서 진짜 깜짝 놀라서 몇 시간 동안 읽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가슴만 졸였어.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네가 그날 밤 전화를 걸었잖아. 나도 모르게 받아버렸는데, 나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어버버대는데 네가 저녁 한끼 하자고 했잖아. 나는 어떨결에 그러자고 했고. 진짜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어.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시올 라구! 시올 라구! 시올 라구!
수연은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여전히 허공을 보고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시올 라구>! 미타는 중이 <첫> 중이. 사이는 전자 루루? 냄비와 석유의 <만남>.
수연은 멍하니 남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손을 떨며 쥐고 있던 담배마저 떨어트렸다. 그녀는 뭔가에 홀린듯 침실로 달려갔다.
그녀는 화장대 위에, 일전에 남자가 손대려고 했던 노트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것을 집고 다시 남자 앞으로 왔다.
그녀는 노트의 첫 페이지를 폈다.
「20xx년 <10월> 9일
민현이와 유명한 레스토랑에 갔다. 샹들리에가 아름답고 물을 와인 잔에 따라주는 멋진 곳이었다. 그곳에 같이 있으니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어서 괜히 긴장이 됐다. 민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얘기를 했다. 무슨 주인 보고 달려오는 대형견처럼 신나서 이야기를 했다. 민현이는 갑자기 <영화 대사>를 따라하기도 했다. <한 팔을 앞으로 내밀더니> 주변 사람들 신경도 쓰지 않고 ‘내게 죽으라면 죽을 게. 그렇지만 사라지진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너무 부끄러우면서도 민현이의 그런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음식으로 <라구> 파스타가 나왔다. 민현이는 여기가 맛집이라며 음식 설명을 해줬지만 사실 음식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숨쉬는 것도 달콤했던 것 같다. 밥을 먹고 나와서 민현이는 또 보자고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서울 하늘이 별 하나 없이도 빛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
수연은 그 페이지를 읽고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남자는 여전히 <한 팔을 앞으로 내밀고> <영화 대사처럼>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보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바라볼 때 남자는 멈추지 않고 다시 헛소리를 했다.
“니를 내를 <안아주는>적 수리한테 모르까 <행복>? 물직하승 듀린터. <노랭> 고랭 <판>시으로<다>. <눈물! 눈물! 아, 눈물>!
수연은 순간 번뜩하며 일기장을 급하게 넘겼다.
「20xx년 12월 1일
오늘은 민현이와 동물원에 갔다. 대부분 애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이었다. 민현이와 그 사이에 함께 걸으니 곧 저게 우리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같이 TV에 나와 유명한 <판><다> 가족을 보았다. 민현이는 어린애처럼 손을 흔들며 판다의 관심을 끌려고 했지만 판다는 귀찮았는지 가만히 누워 대나무만 먹고 있었다.
나는 팬더의 화목한 가족이 계속 보였다. 민현이랑 사귄 지 이제 두 달쯤 지났지만 벌써 나는 민현이와 함께 사는 삶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게 성급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언제나 가족을 바라왔지만, 아무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민현이는 따뜻하고, 다정하고, 순수하다. 몇 주밖에 사귀지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 남자라면 평생 내 삶을 햇빛처럼 채워줄 수 있으리라고.
민현이가 우리 집에 바래다주는 길에 나는 민현이에게 이 감정을 털어놨다. 그런데 놀랍게도 민현이는 갑자기 멈춰 섰다. <노란> 가로등 빛 아래 멈춰 서서 민현이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민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서.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너무 <행복>해서.’
나도 그 얘기를 듣고는 눈물이 왈칵 나왔다. 나는 민현이의 품에 <안겼고> 민현이는 그런 나를 꼭 안아주었다. 오늘부터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는데, 민현이와 함께하면 어떤 겨울이 오더라도 춥지 않을 거 같았다.」
어느새 눈물이 수연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헛소리를 하는 남자의 모습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남자 발 밑에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그녀는 마치 신을 올려다보는 기분으로 남자의 바짓가랑이에 힘없이 매달렸다. 아직 갈지 않은 기저귀에서 소변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연은 입술을 떨며 남자에게 물었다.
“민현이야?”
“갤갤갤 브디엄 슈를 하자! 이에 토를 기침해! 현수니, 골래스, 장미의 코털!”
“민현이지? 그치? 민현이지? 너였던 거지? 너지? 그치?”
<운>! <운!> <운!>
<응?> 맞구나.”
수연은 힘없이 흐느끼며 쓰러졌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형광등 빛이 마치 은총이라도 되는듯, 그녀는 편안하게 웃으며 남자의 발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남자는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타늄 일리를 주이하냐?”
“미티미티로 찔러 넣어!”
“곧 끝나는 하얀 손톱적 비극의?”
13
수연은 그날 밤새 남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말에서 민현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일기장을 뒤적였다. 물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때도 많았지만, 열 개에 한 개 꼴로 남자의 헛소리와 연결되는 일기를 그녀는 발견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동공이 커진 채 환하게 웃으며 마치 민현이에게 말을 걸 듯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피곤해서 시야가 흐려지고 손이 떨렸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어떤 헛소리에서 민현이의 영혼의 윤곽을 보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새벽 4시쯤 둘은 거의 동시에 지쳐 쓰러지듯 그 자리에서 같이 잠들었다.
다음날 수연은 얼굴 한가득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녀의 위에서 남자의 헛소리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다.
“수리모드 죵죵! <자르>미스 야루<잗>? 난 결국 눈눈눈눈<아>!
수연은 그의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남자를 바라봤다. 오늘 남자는 차렷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 머리가 맑아진 그녀는 남자의 헛소리와 민현이와의 기억이 연결되는 것을 의심해볼만 했다. 그녀 또한 무의식적으로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은 민현이가 아닌 그저 자신을 해하려 했던 중년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금 그녀의 귀에 들려온 아침 인사 또한 그저 억지에 불과할 수 있다. 어젯밤 그녀가 미친듯이 해석했던 남자의 헛소리 또한 그저 끼워 맞추기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순간 민현이가 떠올랐다. 살짝 곱슬 진 앞 머리 아래 눈웃음을 지으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민현은 수연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잘> <잤><어>?
“어. <잘> <잤><어>.
수연은 웃으며 남자에게 얘기했다.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아침햇살만큼이나 따뜻했다.
14
그 이후로 수연은 하루 종일 남자의 앞에 앉아 그의 헛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휴대폰엔 편의점 점장으로부터 온 전화 부재중이 수십 통 찍혀 있었지만 그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이푸 <숲>! 줄기를 됴리하면 이니까. 세기 말 키아하까? 피<커피>를 드높여!”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일기장을 뒤적였다. 일기는 그녀와 민현이 사귄 지 6개월쯤 됐던 시점 같이 서울<숲>에 갔던 내용이었다. 둘은 그곳 주변에 유명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일기와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녀는 안심한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녀는 남자를 소중하게 보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건강을 생각해 야채와 고기도 사서 함께 섞어 죽을 만들었다. 그녀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남자에게 죽을 먹여줬다. 그가 헛소리를 하다가 멈추고 음식을 삼킬 때마다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수연은 남자의 주머니에서 그의 집 키를 찾아 그의 집에서 그의 옷가지를 들고 왔다. 그녀는 이전과 달리 더욱 정성스럽게 남자의 몸을 닦았다. 남자가 잠에 들면 그녀는 대야와 비누, 수건을 들고 와 그의 머리를 감기고 몸을 닦고 옷을 갈아 입혔다. 그러면 그녀는 그의 몸에서 나는 기분 좋은 비누향을 맡으며 그의 옆에 잠들었다.
남자는 하루에 6시간정도를 잤는데, 남자가 잠든 후 그의 몸을 닦고 옷을 갈아 입혔기에 그녀는 하루에 적게는 4시간밖에 잠에 들지 못했다. 그녀의 다크서클은 짙어졌고,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몸도 야위어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언제나 행복하다는 듯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일기장도 들지 않고 남자와 대화를 나눴다.
<탸로>디를 <기둥><쁨>일까? 야로 쑤쿠 니릴하자.”
“맞아. 그때 <타로> 카페 갔을 때 <기둥>이 진짜 이<뻤>던 것 같아. 그때 너한테 안 좋은 일 생길 수도 있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말을 들었어야 했나봐.”
<미>주를 냐라해? 기억기억은 플러<안>.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그래도 돌아와 줬잖아.”
“디리리를 샤이소 제카나잖아!”
“나도.”
수연은 이렇게 대화를 나누며 그를 쓰다듬고는 했다.
그녀는 어떻게 남자를 통해 민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어진 기적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여기서 조금 더 파고들면 꿈에서 깨어날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꿈이라면 영원히 꿀 수 있겠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그녀에겐 민현과 함께하는 하루 이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없은 삶은 그저 끝없는 사막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설령 지금 대화를 나누는 민현이 신기루라도 그녀는 그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메말라 죽을 몸, 신기루 속에 파묻혀 모래를 삼키는 것이 그녀는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15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수연은 남자가 잠든 후 휴대폰을 들어 은행 계좌를 확인했다. 다행히 지출이 크지 않았기에 돈은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의 수익이 없었기에 그녀는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3개월이 지날 때쯤 잔고가 바닥날 것이다.
그때 그녀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남자는 몇 달 전 그녀의 집에 침입했던 중년 남성과 다를 것이 없었다. 불현듯 그녀는 남자에 대한 생각이 났다. 그녀는 남자가 돈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남자의 바지를 빨며 따로 빼 뒀던 신용카드와 휴대폰을 들고 왔다. 휴대폰은 배터리가 없어 꺼져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충전하고 휴대폰을 켰다. 휴대폰을 켜자 ‘딸’이라는 사람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려 통 찍혀 있었다.
수연은 은행 어플을 켰다. 남자의 손가락을 가져와 지문 인증을 하고 잔고를 확인했다. 잔고에는 그녀가 상상도 해보지 못한 금액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계좌가 신용카드와 연결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신용카드의 만료일은 대략 2년 뒤였다.
그 순간 그녀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꼈다. 그녀는 뒤돌아 남자를 봤다. 그녀는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 했다. 자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민현이의 휴대폰을 맘대로 열어 계좌를 확인한 것이 죄책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혐오하는 것은 남자고 그 남자의 돈은 어떻게 쓰든 아무런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너무도 사랑하는 것은 민현이고, 그녀는 남자를 통해 민현이와 대화했다. 그렇다면 남자는 수연에게 무엇인가? 그저 민현이와 이어주는 전화기와 같은 것일까? 그러면 수연은 남자의 의식 너머에 있는 민현이의 넋과 대화하는 걸까? 그러나 그녀는 이미 민현이와 남자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헛소리를 하고 자신이 떠준 밥을 먹는 남자를 볼 때마다 그녀는 이미 민현이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남자와 함께 하는 하루는 민현과 함께 하는 하루와 같았고, 그의 목소리는 전부 민현의 목소리였다. 다시 말해 그녀가 지금 확인한 계좌는 민현의 계좌와 같았다.
수연은 조용히 잠든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민현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지만, 어느새 수연의 눈에는 남자의 얼굴에 민현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그녀가 남자를 사랑하고 민현을 사랑했는지, 민현을 사랑하고 남자를 사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 앞의 사람을 민현이라고 칭하고, 그것을 사랑하면 그녀에겐 그만이었다.
그녀는 민현의 얼굴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아내가 남편 돈은 맘대로 써도 되잖아. 생활비로 쓰겠다는 건데. 그치?”
수연은 남자의 옆에 누웠다. 그녀는 남자의 가슴 옆쪽에 얼굴을 묻고 편안하게 웃었다. 그녀는 내일 남편의 돈으로 장을 볼 생각에 설레며 잠들었다.
16
수연이 남자의 돈으로 생활하던 어느 때였다. 그녀는 현금을 인출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계좌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다행히 비밀번호는 남자의 지문과 신분증, 은행에서 이전에 발급해준 문서로 갱신이 가능했다. 그녀는 남자의 방에 문서가 쌓여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곧바로 가방을 하나 들고 와 헛소리를 하는 남자에게 말했다.
“갔다올게.”
“슈루탄탄! 슈루탄탄!”
“금방 올게.”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하고는 현관문을 나서, 옆 건물의 남자 집으로 갔다.
그녀는 이제는 익숙하게 남자의 방에 들어서 문서더미를 찾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은행에서 발급해준 문서를 찾았다. 그녀는 살짝 웃고는 가방 지퍼를 열어 그것을 넣으려 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수연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서 있었다. 수연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그저 바보처럼 입을 벌리며 여자를 바라봤다.
“누구신데 우리 아빠 집에 들어와요?”
수연은 그제서야 저 여자가 남자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서지현’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보았다. 상대가 그저 어린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여유롭게 말했다.
“애인.”
지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저 수연을 쳐다봤다. 수연은 그런 지현의 반응이 거슬렸으나, 오래 마주하고 있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가방 지퍼를 잠갔다.
“그럼 이만 가볼”
“아빠 어딨어요?”
지현이 물었다. 수연은 대답하지 않고 지현을 비켜서 지나가려 했지만 지현은 문 앞에 서서 수연이 가려는 방향에 따라 몸을 움직여 길을 막았다. 수연은 입술을 잠깐 깨물고는 말했다.
“먼 곳에.”
“먼 곳 어디요?”
“너한테 말해야 해?”
“네.”
“가족이랑 연 끊고 싶대. 나한테 이혼해서 힘들었던 일도 다 얘기했어. 너도 알잖아? 회사 팔고 지금은 나랑 여행 다니면서 살고 있어. 아빠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 오지랖은 안 부리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고 수연은 지현과 어깨를 부딪치며 나가려 했다. 그러나 지현은 수연의 손목을 냅다 잡았다. 수연은 당황하며 멈춰섰다.
“너 지금 이게 뭐하는”
“방금 가방에 넣은 건 뭐예요?”
“너한테 알려 줄 필요는 없는데?”
“종이였던 거 같은데? 중요한 문서 아니예요?”
“알 거 없다고!”
수연은 지현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러나 지현은 더더욱 세차게 문을 막아서며 말을 이어갔다.
“애인 아니죠?”
“뭐?”
수연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반문했다. 지현은 분명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지만, 수연에겐 그것이 민현에 관해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애인 아니잖아요. 방금 넣은 거 중요한 문서 아니예요? 그렇게 중요한 거를 애인한테 맡길 리 없잖아요.”
“우리 사이는 특별해.”
수연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녀는 점점 지현에게 화가 났다. 지현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보다도, 민현(남자)와 자신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더 심기가 거슬렸다.
“아무리 특별해도 저와의 관계만큼 특별할까요? 제 전화는 하나도 안 받는데 그쪽한텐 집 키까지 주고 중요한 문서 심부름까지 시킨다고요?”
“너와의 관계가 뭐 얼마나 특별하다고.”
“몇 십 년 같이 산 가족이 애인보다는 특별하지 않을까요?”
지현은 흔들리지 않고 반문했다. 수연은 점점 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좋을 것이 없다고 수연은 생각했다.
그녀는 조급하게 대화를 갈무리 짓고 지현 옆을 지나가려 했다.
“네가 뭐라고 말하든 민현이와 나의 관계는 특별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민…누구요?”
순간 지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수연의 어깨를 잡았다. 순간 수연은 멈춰 서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이 뱉은 말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녀는 다리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줌마, 아빠 이름 말해봐요.”
수연은 침묵했다. 물론 그녀는 남자의 신용카드 등을 이용하며 그의 이름을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민현이라는 이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자신이 하루를 같이 보내는 그 남자의 이름이 민현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수연은 대답하지 않고 지현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지현은 이번에는 순순히 보내줬다. 수연은 그대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17
수연은 손톱을 깨물며 소파 위에 웅크려 앉았다. 남자는 여전히 거실 한가운데 서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바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쓔니는 아치르.”
“너랑 나 사이를 갈라놓으면 어떡해? 경찰이라도 신고하면 끝이잖아.”
“비치는 댜리아 스르스르.”
“여보 딸이잖아, 여보가 어떻게 못해?”
“구름을 하늘과 사리는?”
“맞아. 여보가 어떻게 할 순 없지. 그래도 저대로 둘 수는 없잖아.”
“미를 오는 기타타!”
“뭐?”
“탭탭! 탭! 패티는 분무기 프레이!”
“잠시만, 정말? 아니, 그래도”
“듀란듀란을 창문하는 모자이크.”
“그러면, 정말? 알았어. 그래도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시도는 할 게.”
18
수연이 남자의 집에 키를 대고 들어가자 현관 앞에 지현이 서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가방은 남자의 방 구석에 놓아둔 상태였다.
수연은 마른 침을 삼키고 지현을 바라봤다. 지현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고, 수연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왜 여기서 보자고 한 거예요?”
침묵을 뚫고 지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에 수연은 목을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식탁에 앉아서 이야기할까? 물이라도 한잔”
“괜찮아요. 여기서 빨리 이야기해요. 일단 질문에 답해주세요. 왜 여기에요?”
지현을 말을 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수연의 눈썹 한쪽 끝이 살짝 올라갔지만 그녀는 참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여기서 보자고 한 건, 밖에서 하기에는 민감한 이야기라서 그래요. 아무래도 딸 있는 여자의 애인이잖아요.”
“뭐, 좋아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르신 거예요?”
수연은 잠시 침묵했다. 입술을 깨물고 싶었으나 뭔가를 숨기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에 그녀는 참았다. 그녀는 편의점에서 자신에게 담배를 준 여자를 생각했다. 그녀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어딘가 과장된 미소. 수연은 그것을 떠올리며 활짝 웃었다.
“그게, 그때 학생이랑 이야기했는데 안 믿는 눈치여서요. 또, 두…두진 씨 딸인데 제가 너무 예민하게 군 것 같기도 해서 사과하려고요.”
수연은 두진이라는 이름을 내뱉으며 속이 뒤틀렸으나 끝내 참아냈다. 지현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저 수연을 바라봤다. 수연은 그녀의 위압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말을 이어갔다.
“그, 일단 그때 들고간 건, 두진씨가 신용카드 쓰려고 하는데 뭐 은행에서 받은 문서가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대신 들고 온 거예요. 두진씨는 그때 몸이 안 좋아서 제가 대신 왔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두진 씨 폰으로 학생한테 전화 걸었잖아요! 제가 애인이 아니면 어떻게 그러겠어요?”
“왜 아빠가 안 걸고 그쪽이 걸었는데요?”
“그거는, 두진 씨가 가족이랑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요.”
지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연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내가 한 말을 믿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의심하고 있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애써 지현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현은 수연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아빠는 어디있는데요.”
“두진씨는 지금…알려 줄 수 없어요.”
“왜요?”
“알려주면 찾아올 것 같다고 알려주지 말래요. 그래서 제가 지금 대신 왔잖아요. 두진 씨가 직접 찾아오면 해결되는 걸 번거롭게 내가 찾아와서 미안해요.”
수연은 부드러운 말투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녀는 이쯤되면 지현이 자신의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해 그녀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지현은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더 이상 그녀의 반문이 없었기에 수연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더 의심할 건덕지가 없을 거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현이 한 번 더 물었을 때, 그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답변을 했다.
“그럼 아빠는 지금 먼 곳에 있어요?”
“네.”
“차 타고 갔죠?”
“네.”
“차 밑에 그대로 있던데요?”
순간 수연은 피가 차가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 표정이 굳는 것을 숨기지 못한 채 지현을 바라봤다. 지현은 팔짱을 끼고 수연을 내려다봤다. 수연은 그녀가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수연은 뭔가 변명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애써 입을 열었다.
“아, 저, 그게, 새로운 차를 사서”
“비싼 외제차 버리고 새로운 차를?”
지현은 싸늘하게 말했다. 수연이 만약 여기서 더 능숙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면 지현 또한 의심을 그만뒀을지 모르지만,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현은 작게 코웃음을 치며 그런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순간 남자가 선물해줬던 곰인형이 수연의 앞에 나타나 말했다.
“끝났어.”
수연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곰인형은 그녀의 흉부를 갈라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의 내장을 모두 빼고는 그 자리에 솜을 채워 넣은 채 그녀의 머리를 현관문 틈에 끼웠다.
“세상에, 죽은 사람이 돌아올 리 없잖아.”
“그냥 다 환상인 거지.”
“받아들여.”
“등기 우편입니다!”
“병신.”
“용돈 줄까?”
“세상에 무슨 기적 같은 게 일어나서 죽은 사람이 돌아와?”
“결혼해줘.”
“그러니까,”
“경찰에 신고할 게요.”
지현이 말했다. 수연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여전히 곰인형이 현관문 문틈에 그녀의 머리를 끼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쪽 말대로 아빠가 그냥 여행 다니는 거면 실종 신고정도는 해도 괜찮잖아요. 괜찮죠?”
수연은 여전히 대답 없이 곰인형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제 가서 현실을 마주해.”
“넌 그냥 외롭게 죽어가다가”
“변태한테 잘못 걸려서”
“한 사람 인생 망친”
“병신이야.”
“경찰서가서”
“울면서 빌어.”
“그게 최선이야.”
수연은 넋놓고 그 말을 들으며 눈동자를 올려 지현을 바라봤다. 지현은 수연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에게서 뒤돌아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누르고 있었다.
순간 수연은 그 모습을 보며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현의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향해가는 것을 볼 때, <수연>은 민현적 남자는 가뭄과 같이 환하고 예쁜 눈웃음으로 튜시 뿌르까<아>? <그리워>한다고 죽은 사람이 키라오 스지알. 너도 알던 <가>니이토?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툥각적 블루스를 슐타하지 <지>리온. <마>티마티마티. <사>해와 모래의 의자. 태어나. 죽어. 뿌르르. <랑>듀랑듀. 어제나 지금이나 <해>해해.
“<나도 그리워. 사랑해>.”
수연은 작게 중얼거렸다. 순간 그녀의 눈에 남자의 방문 앞에 놓인 아령이 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들었다. 분명 수연이 한손으로 들기 쉽지 않을 무게였을 테지만 그녀는 그것을 높이 든 채 지현에게 다가갔다.
지현이 경찰에 전화를 걸기 직전 수연은 아령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지현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수연은 그녀의 등 위에 올라타 그녀의 뒤통수를 아령으로 내려치며 힘없이 울먹이며 말했다.
“이미루를 키지하도록 피운 숲과 저리의 망도록. 처리빠을 듀를 꾸르까.”
이미 지현의 머리가 다 으깨지고 지현의 심장이 멈췄음에도 수연은 계속 아령으로 그녀의 머리를 내려쳤다.
19
수연은 남자의 집 화장실에서 얼굴과 팔에 묻은 피를 씻어냈다. 그녀는 지현의 시체를 바라봤다. 머리가 있던 자리에는 그저 사방으로 퍼진 핏자국만이 남아있었고, 그녀의 몸은 싸늘하게 쳐져 있었다. 그녀는 수건으로 자신의 몸에 물기를 닦아내며 피식 웃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 남자의 침대맡에 놓인 담배갑이 보였다. 그녀는 남자를 통해 민현을 만난 이후로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다. 그녀는 담배갑을 들어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옆의 라이터를 집어 불을 붙였다.
지현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매 순간 수연은 울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경악하며 울부짖다가 경찰에 자수하고 절망하고 싶었다. 평생을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며 자숙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담배 연기를 마시며 그 유혹을 꾹 눌렀다. 그녀는 애써 계속 웃음 지었다. 그녀는 잔인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우고 그녀는 꽁초를 지현의 등에 비벼 껐다. 그녀의 피부에 구멍이 뚫렸다. 수연은 그것을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씨발년.”
그녀는 그대로 가방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작게 중얼거렸다.
“수리를 미타이지? 플러플러. 니라수라기 아니지. 피피. 피. 피피피. 니그르.”
마침내 그녀가 자신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여전히 거실 한가운데 서서 말을 하고 있었다.
<왔어?>
민현이 햇빛처럼 투명한 미소를 띄며,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연은 그를 보자마자 가방을 떨어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민현에게 달려가 안겼다.
<해냈어…내가, 내가 해냈어! 너랑 나 사이를 가로막는 년을 죽였어! 걸레 같은 년….>
<잘했어.>
민현은 가슴에 수연을 안은 채 그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수연은 그에 따라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더욱 세차게 눈물이 나왔다. 이에 민현은 자신의 품에 수연을 더욱 세게 안아주며 말했다.
<수연이가 원하는 건 하나잖아. 그냥 나랑 함께 사는 거. 나도 수연이랑 평생 그렇게 살고 싶어. 그걸 위해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괜찮아.>
<나도…나도 뭐가 와도 견딜 수 있어. 넌 내 선물이잖아. 너와 함께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그냥 너랑 이렇게 있기만 하면 돼.>
<우리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사랑해.>
<사랑해.>
“티라니 야리는 수리뿌! 네? 내? 나? 튜리를 마지막 스로히지마!”
거실로 넘쳐흐르는 정오의 햇빛 속에서, 수연은 민현의 품에 더욱 파고들며 생각했다. 신맛이 나는 것은 모두 오렌지라고.